대한민국에서 가장 못사는 열악한 지역을 끌고 오면서 몸소 체험한 경영철학을 말하고자 한다. 군수로 당선되기 전에는 KBS에서 교양쪽 PD생활을 12년간 해왔다. 그 시절, KBS PD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남자 나이 40세 전후가 되면 한 번쯤 자기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정리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여 만 39세 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과감히 터닝 포인트를 삼고 정치에 입문하여 고향땅 군수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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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큰 사찰이나 높은 산, 이렇다 할 특산물도 없었고, 하다못해 역사에서 귀양을 온 사람도 없는 동네였다. 그러나 어떤 책임을 맡고 일을 하면서 가장 무능한 사람은‘탓하는 사람’이다. 돈 없다고 예산 탓하고, 이것밖에 할 수 없다며 제도와 권한을 탓하는 사람은 다른 일을 맡겨놔도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국에서 가장 잘사는 강남구를 맡은 것보다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함평군을 맡은 것이 행복하다는 마음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함평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고민했다. 삼성 본사를 함평으로 이전한다면 중장기적으로는 비전이 있겠지만 농업인구가 71%였으니, 농업을 간과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마지기당 몇 섬 수확이라는 양의 개념이었으나 앞으로는 질의 개념으로 바뀔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면 친환경농업을 개발해야만 한다. 그래서 공직자들과 농어민 단체들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다들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맡은 기간 잘 지내다가 가라는 반응이었다. 전국의 백화점과 공판장, 전문 유통업자들을 만나보았지만‘함평’이라는 상품은 매력이 없었다. 딱히 끌리거 나 떠오르는 것, 즉 브랜드가 없었다. 함평이 지리산 계곡이었거나 철책 근방이었다면 청정지역 이미지로 친환경농업이 어울리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억지였다. 무심결에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다가 필자가 KBS PD시절에 잠깐 다뤘던 나비가 떠올랐다. 나비로 축제를 하면 세계 최초의 나비축제가 되니 블루오션으로서 선점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함평을 친환경농업지구로 각인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농업소득은 점점 줄어들 테니 농업 외 소득으로 경쟁력을 창출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1세기 문화관광환경의 세기를 맞이해서 나비축제는 해볼 만한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타깃을 학생으로 잡았고, 생태체험형식으로 추진하여 부모들도 덩달아 오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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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젊은 군수가 뚱딴지같이‘나비’이야기를 한다면서 다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항상 밀어주시던 아버지마저도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PD경험을 바탕으로 나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더욱 세심하게 준비하게 되었다. 꽃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지만 나비를 구하는 일이 문제였다. 그래서 아웃소싱으로 제주도에서 나비를 잡아와 교미를 시키고, 비닐하우스를 200평 정도 만들어서 나비를 풀어놓고 나비생태관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1999년 5월 어린이날에 오픈했는데, 기적을 보게 됐다. 순식간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나비축제가 성공하리라 짐작도 못했던 지역민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아 주변 슈퍼나 식당은 물건파동 현상이 일어났고, 집에서 쉬던 경찰들이 수많은 인파로 인해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축제가 끝나자 드디어 주민들은‘이제 뭔가 되려나 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함평에서 오래 살던 사람들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처음 본 것이었다. 그러면서 공무원들도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군수의 말을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소중한 성과였다. 군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인사철만 되면 사람들이 군수에게 돈을 싸들고 찾아 왔다. 돈을 안 받는다고 말하고 돌려보내면 세 번까지 다시 찾아왔는데, 오직 일로써 승부하자고 설득했다. 군수로서 모범을 보이고 원칙을 세웠더니, 점점 일하는 분위기로 변화되었다. 나비축제가 대단하다고 평가할 만한 것은, 외부의 기획사 한 사람을 받아들인 적 없고 전부 자체 토론으로 이뤄낸 것이다. 그래서 차별화가 되었다고 본다. 매사에 관광객 입장에서 보았고 가장‘함평스럽게’, 보고 가는 관광지가 아닌 체험하는 관광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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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축제가 성공하자 여러 지자체에서 덩달아 나비를 주제로 한 다양한 생태관을 짓기 시작하며‘따라하기’ 에 나섰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는 했다. 그래서 더욱 차별화하기 위해 국내가 아닌 세계로 눈을 돌렸다. 나비곤충을 산업화시키기로 하고 나비엑스포를 준비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이후에‘나비’성과가 매우 좋았다고 판단했는지 전부 동의해주었다. 그래서 만장일치로 통과하여 드디어 지난해에 나비축제 10회를 맞아 엑스포를 열게 됐다. 세계곤충학회 모든 회원이 참여하여 그들과 공동으로 개최했다. 그래서 나비곤충만은 미국에 가든 유럽에 가든 함평이 메카로 소문이 나 있다. 곤충이 많이 멸종돼 가고 있지만, 만약 곤충이 모두 멸종되면 모든 동식물도 4, 5년 후면 따라서 멸종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나비곤충이 멸종된다면 과일이나 곡식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곡식이 없으면 사람도 살 수 없지 않은가. 곤충은 이렇게 인류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계에서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곤충을 가지고 축제도 하지만 산업화를 이룬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 이제는 엑스포를 세계곤충학회와 함평군이 각국을 돌면서 축제를 해보자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나비곤충과 엑스포, 축제를 통해서 함평의 모든 농축산물은 나비 브랜드이다. 지금까지 천만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처음 축제에 다녀간 초등학생들도 이제는 성인, 즉 소비자가 되었다. 함평이라는 지역이 브랜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과거의 함평에 대한 강한 이미지보다는 이제는 전체가 나비곤충 콘셉트로 가고 있다. 휴지통도, 가로등도, 민박집 벽지도, 덮고 자는 이불도 나비 천지다. 함평에 와서 걷고 잠을 자도 나비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들겠다는 취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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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골프에 있어 가장 뜨는 선수 하면 신지애다. LPGA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이 신지애가 함평골프고등학교 출신이다. 농업이 어렵다 보니 함평농업학교에도 학생이 줄었다. 폐교 직전이었다. 학교를 살리기 위한 고민에 들어갔다. 제주처럼 골프학과를 만들까 하다가 아예 골프학교로 전향하기로 했다. 전통 있는 학교를 바꾼다고 하자 유지들이 또 나서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기 손자들도 농업학교에 보내려는 어른은 아무도 없다. 결국 골프고등학교로 과감히 전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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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1톤 사서 황금박쥐 조형물을 만들어놓으면 세계적인 환경상품이나 문화관광상품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자 주변에서는‘나비’는 어쩌다 잘된 것인데 이건 안 될 거라며 반응이 냉담했다. 그러나 조형물을 만들어 놓으면 손해가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금이 사라지거나 닳는 게 아니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와 관광산업 등을 생각하면 일거양득 이상의 소득이 있을 터였다. 그래도 반대의 소리는 높기만 했다. 그래서 우선 중앙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30억원을 요구했지만 10억원만 받았다. 그것으로 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농로, 도로 포장을 줄이고 여기에 투자하자고 역설했다. 1톤에서 양보하여 162킬로그램을 사서 홍익대학교에서 제작했다. 지난해에 황금박쥐 조형물을 선보였는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작은 조형물이지만 관광객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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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신안 앞바다에서 뱀을 밀수하다가 걸렸다는 뉴스를 보니 그러면 두어 달 보관하다가 나중에 소각 해버릴 것은 뻔했다. 그 뱀들을 빌려서 나비생태관에 함께 전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곤충뿐 아니라 파충류까지 분야를 넓히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관세청장에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자들이 복병이었다. 나비축제에 수입 뱀을 전시한다며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마침 홍보비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네거티브 홍보로 전략을 바꾸었다. 축제 때 뚜껑을 열자, 줄이 두 줄이 되었다. 한 줄은 나비를 보러 가고, 한 줄은 뱀을 보러 가는 줄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뱀을 키우는 사람, 뱀을 연구하는 사람을 다 만났다.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복지부에 예산을 신청하면서 올해 170억원을 확보했다. 뱀 생태관도 짓고 있다. 뱀 생태관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으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우선 뱀 생태관을 만들어서 아마존의 아나콘다, 코브라도와 같은 큰 뱀들도 들여오지만, 애완용 뱀도 수입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자연생태에 잘 어울리는 뱀 생태관을 지을 예정이다. 독도 안 죽을 정도로 먹으면 좋다고 한다. 그래서 뱀 독을 이용한 신약 개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보양쪽과 연결한 방향도 생각하고 있다. 뱀도 특수가축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야생에서 뱀을 잡아먹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겠지만, 키워서 사용한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그린투어리즘을 넘어서 헬스투어리즘을 바라보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상품이 성공하리라 본다. 이렇게 항상 가능성을 찾아 몸부림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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